나의 꿈은?
아놀드 웨스커의 <키친>을 보고
6월 4일은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지만, 미리 추천 연극을 봐 두지 못했던 나는 그 날 연극을 봐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번에도 연극과문화 레포트를 위해 연극을 하나 보았고, 그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연극을 한 편 더 본 지라 연극에 익숙해지고 그 재미를 알게 되었는지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왕 볼 거 더 비싼 거라도 보고 싶은 걸 보자, 하고 연극을 고르던 차에, 전에 연극 <동 주앙>을 보았던 명동예술극장에서 <키친>이라는 연극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키친'이라는 제목과 포스터의 요리사들이 내 눈길을 끌었고, 그들이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서 이 연극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터미션이 15분 정도 포함된 총 145분의 긴 연극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끌리는 이 연극을 위해 나는 일요일, 혼자 명동으로 향했다.
배경은 영국의 한 식당. 하루에 2000명분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이 거대한 식당의 주방에는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본국인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키프로스까지. 주방장이 내놓는 음식은 언제나 똑같고, 늙은 지배인은 높은 봉급을 내세우며 종업원들을 엄청난 일거리로 내몬다. 미칠 정도로 바삐 움직이는 이 식당은 피터를 주축으로 한 불협화음으로 더욱 어지럽다. 식당의 모든 종업원들에게 '악마'로 통하는 피터는 얄밉게도 사람들을 놀려대면서 싸움을 부추기는 인물이다. 오늘 들어온 신입 종업원 둘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근무 환경과 피터에게 질리고 만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식당에서 함께 일하는 모니크가 바로 그의 연인이다. 피터는 하루 빨리 모니크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유부녀인 모니크는 왜인지는 몰라도 하루 빨리 이혼을 하지 않고 피터를 초조하게 만든다. 새로 온 종업원들이 온 오늘도 부산스러운 점심시간. 손님들의 식사 시간이 지난 뒤, 잠시 찾아온 쉬는 시간에 피터는 종업원 친구들에게 '꿈'을 말해보자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식당이 사라진다면, 뭘 하고 싶은지 말이다. 처음에 그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말하기를 주저하던 친구들은 결국 자신의 소소한 꿈들을 펼쳐 내본다. 돈을 벌고 싶다, 작업실을 갖고 싶다, 자고 싶다, 그리고 피터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꿈까지. 꿈을 말한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기회를 준 피터에게 감사하면서 피터의 꿈을 듣고자 하지만, 왠일인지 그는 괴로워하면서 꿈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리고 이혼을 하지 않는 모니크와 다투면서 또 괴로워하고, 결국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칼을 들고 온 식당을 휘저으며 난동을 부린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돌아온 피터에게 지배인은 그렇게 돈을 주고 일자리를 주는데 왜 자신을 괴롭히냐고 피터를 다그치지만, 피터와 다른 종업원들은 뭐가 문제냐고 묻는 지배인을 뒤로 한체 퇴장한다.
피터는 왜 꿈을 말하지 못했을까? 식기구로 된 성을 만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친구들에게 꿈을 말해보라고 한 자신이면서, 어째서 말하지 못했을까? 드미트리는 그가 꿈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피터의 꿈은 모니크와 아이를 갖고 행복하게 사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니크는 항상 남편에게 피터에 대해 말한다고 했지만,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은 없다. 그래서 좌절하고, 꿈을 말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가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하기 전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니크가 피터를 거절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 재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슬며시 생각해본다. 피터를 사랑하지만, 피터와 함께하는 이상 식당에서 일하는 것 이상의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식당을 나간다 해도 그리 넉넉한 삶을 살지는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남편은 부유하고, 언제든지 자신을 돈으로는 충족시켜줄 수 있다. 일단 내가 연극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답변은 이 정도인 것 같다.
이 연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템포의 변화'이다. 특정한 장면이 인상 깊었다고 하기에는 모든 장면들이 기억에 남았기에, 연극 진행의 속도 변화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아침 일찍, 느릿느릿하게 하루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식당으로 출근함에 따라 점점 빨라지는 템포, 그리고 사람들이 넘치는 점심시간 무렵 미치도록 빠르게 돌아가는 식당. 그리고 인터미션과 함께 찾아오는 식당의 쉬는 시간. 이러한 속도의 변화가 정말 인상 깊었다. 이러한 속도의 변화가 연극의 완벽한 연출을 돕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주방을 완전히 재현한 무대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배우들은 무대 위에 세팅된 주방 위에서 각자 담당하는 구역이 있으며, 그 구역에서 자신이 맡은 요리를 한다. 빵을 만드는 사람은 반죽하는 연기를 하고, 스테이크를 만드는 사람은 망치를 두들기고, 생선 요리를 하는 사람은 칼을 들고 저미는 시늉을 한다. 그 동작이 너무나도 실제와 흡사해서 정말 놀랬다. 특히 생선을 저민다던지 반죽을 한다든지 하는 연기는 정말로 반죽을 들고, 생선을 잡고 요리를 하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졌다. 서빙을 하는 여자 종업원들은 무대 바깥으로 향하는 출입구 쪽에서 주방으로 들어와 주문한 요리를 받기 위해 요리사들 앞에 서서 요리를 기다리고, 요리사가 요리를 담아준(물론 실제로 담겨있지는 않지만, 요리를 담는 것조차 실제처럼 연기한다) 접시를 들고 또각또각 주방문을 나선다. 그 부산스러운 가운데서도 요리사들이 꿋꿋이 자신이 맡은 요리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재현되어서 실제 주방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아놀드 웨스커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고 하며, 배우들도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도 서빙을 하는 교육을 받으면서 연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생한 연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지배인은 '돈과 일자리를 주는 데 뭐가 문제냐, 뭘 더 원하냐'고 모두에게 소리친다. 그러나 종업원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몇 번 바라보고는 무대 뒤로 퇴장한다. 지배인은 정말로 종업원들이 원하는 것이 돈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들은 매일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꿈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지배인은 그저 돈, 돈을 위해 일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꿈은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지배인은 자신의 그런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꿈마저 판단한 것 같다. 종업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연극은 내가 본 세 번째 연극이지만, 본 연극들이 다들 느낌이 무척이나 달랐다. 첫 번째로 본 <동 주앙>은 비교적 소규모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주인공 동 주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살짝 빠른 템포로 전개되면서 사회 풍자를 하는 반면, 두 번째로 본 로맨틱 코미디 <옥탑방 고양이>는 소극장이어서 그 감동이 더 가까이에서 느껴진, 1인 다역의 연기가 돋보이는 달콤한 연극이었다. 반면 <키친>은 때로는 미칠 듯이 빠르게, 때로는 여유롭게 진행되는 템포의 변화가 돋보였고, 주인공의 이야기와 함께 주변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도 같이 녹아있던 연극이었다. 그리고 규모 또한 다른 두 연극에 비해서는 큰 편이라,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식당을 재현해낼 때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키친>은 주방이라는 공간을 너무나도 리얼하게 표현해 낸, 그리고 그 속에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녹여놓은 멋진 연극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꿈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해 주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나는 어느 날 학교가 사라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사진 출처 : http://www.playdb.co.kr/playdb/PlaydbDetail.asp?sReqPlayNo=23399
'studi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학 참고 자료 (2) | 2011.07.01 |
---|---|
인간과 글의 상관성 (0) | 2011.06.13 |
[링크/이탈리아어] 정관사와 부정관사 (0) | 2011.04.29 |
[연극] 시대를 넘나드는 통쾌한 풍자, ‘동 주앙’ (0) | 2011.04.17 |
연극과문화 2강 정리 (0) | 2011.03.28 |